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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정보/역사 상식

꼭 알아야 할 몽골의 역사는?

by 사콜 사콜 2021. 6. 6.

꼭 알아야 할 몽골의 역사는?

 

오늘의 주제는 꼭 알아야 할 몽골의 역사입니다. 

 

몽골제국 - 세계사의 시작

 

우구데이 칸의 후계자는 구육 칸이었고 그 뒤를 이은 사람은 몽케 칸이었습니다. 몽케 칸 때에도 정복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몽케 칸의 동생인 훌라구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했고, 또 다른 동생인 쿠빌라이가 남송을 정복하기 위해 중국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 몽케 칸이 사망했습니다.

 

몽케 칸이 죽자 동생인 쿠빌라이가 중국에서 쿠릴타이를 통해 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생 아리크 부케가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다시 열어 칸에 즉위했고 형인 쿠빌라이가 칸에 즉위한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명의 칸으로 4년간의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내전은 몽굴 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우구데이 가문을 중심으로 한 아리크 부케 세력은 유목사회 중심으로 몽골의 전통을 지키려 했고 쿠빌라이는 유목과 농경을 융합해서 정착하기를 바랐습니다. 내전의 승리자는 결국 쿠빌라이였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몽골 전체의 황제이기는 했지만 원래 몽골은 부족을 중심으로 한 체제였습니다.

 

바투의 세력이 중심인 주치 부족인 킵차크한국, 우구데이 부족은 우구데이 한국, 차가타이 부족은 차가타이한국, 훌라구 부족은 일 한국을 지배했습니다. 쿠빌라이는 대칸으로 이 모든 지역의 칸이었습니다.

 

부족들은 농경민을 보호하고 생산을 방해하지 않아야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산지와 초원에 머물며 도시를 파괴하지 않고 농경지에 가축을 방목하지 않으며 농민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부족 간의 문제가 해결된 쿠빌라이 칸은 자신이 직접 지배할 중국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남송을 공격했습니다. 지속적인 지배를 위해 약탈과 방화를 금지했고 정복한 후에는 농경지와 운하를 복구하고 농민에게 빼앗은 씨앗과 농기구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몽골인이 다수의 중국인을 지배하기 위해 '몽골인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민족차별 정책을 폈습니다. 이전까지 몽골은 능력을 중시하며 민족과 종교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았지만 정착생활을 위한 불가피한 변화였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천년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

 

<워싱턴포스트> 1995년에 지난 천 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하였습니다.

 

선정 이유는 "칭기즈칸은 사람과 과학기술의 이동을 통하여 지구를 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를 뒤흔들고 근본적 변화가 오게 만들었다"라 밝혔습니다.

 

북방의 유목민족 몽골이 세계를 제패하고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제국을 만들어낸 데에는 바로 칭기즈칸이란 '영웅'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칭기즈칸은 탁월한 능력과 지도력으로 몽골 민족을 단결시키고 그 역량을 극대화함으로써 마침내 세계적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

 

지역을 기준으로 역사를 나누면 자국의 역사 외 그 외 지역의 세계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세계사라고 하면 전 지구에 있는 인류의 역사를 일컫는 말이지만, 과거에는 자신이 인식하는 대상과 지역만을 세계사라고 여겼습니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전 지구의 인류가 포함된 세계사는 근대 이후에 생긴 인식입니다.

 

근대 이후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의 구석구석이 알려지고 여행의 발달로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서로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세계사를 전지구에 있는 모든 인류의 역사라고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근대 전에는 동서양을 아우리는 최초의 세계사가 없었을까요. 칭기즈칸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하나의 제국으로 만든 칭기즈칸을 세계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해 볼 때 이 둘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 많은 것을 공유하게 만든 최초의 인물이 칭기즈칸입니다. 제국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던 칭기즈칸의 제국인 몽골을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몽골 초원이라 불리는 북쪽에는 오래전부터 여러 유목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11세기 기후가 추워지면서 초원이 피폐해지자 유목민족 간의 경쟁과 전쟁이 치열해져 약육강식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테무친은 부족 간의 경쟁에서 패배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자신의 그림자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외롭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테무친은 이 시기를 잘 극복하고 몇몇 부족장들과 연합해 주변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1206년에는 부족 연맹 회의인 쿠릴 타리를 통해서 왕들의 왕인 칸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그를 칭기즈칸이라고 불렀습니다.

 

몽골 초원의 동남쪽에는 오랜 농경생활을 통해 경제와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송 나와 이런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있었습니다. 서남쪽으로는 활발하게 무역을 하는 이슬람 왕국들이 었었습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사주한 것이 금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몽골이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나라의 견고한 성채를 무너트려야 했기에 공성의 중요성을 절감한 칭기즈칸은 중국과 서역의 기술자를 동원해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했습니다.

 

몽골의 공격이 계속되자 금나라는 여자와 비단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했고, 몽골은 이를 믿고 회 권했으나 그 틈에 금나라는 수도를 남족으로 옮겼습니다. 이에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서쪽으로는 교역을 위해 호레즘 왕국에 상인과 사신단을 보냈지만 사신단이 모두 죽임을 당하자 분노한 몽골의 서방 정복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을 거쳐간 모든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도시의 사람들은 몰살을 당했습니다.

 

수도인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자 호레즘 왕은 카스피 해로 도망치다 병사했습니다.

 

칭기즈칸은 4명의 아들에게 정복한 지역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칭기즈칸은 호레즘 왕국을 공격할 때 군대를 보내지 않았던 서하를 응징하러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버지 뒤를 이은 아들은 우구데이였습니다. 부족회의인 쿠릴타이를 통해 칸 중의 칸이라는 호칭을 받고 정복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정복전쟁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은 전쟁의 목표가 오직 약탈이었다면 우구데이 칸부터는 정복한 지역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전처럼 무조건 공격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하기 전에 몽골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일지 의사를 물었습니다.

 

만약 항복을 한다면 왕이 직접 몽골의 칸을 만나 지배를 수용하는 의식을 치르게 되고 왕의 자식을 인질로 몽골로 보내면 더는 전쟁과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용된 곳을 지배하기 위해 통하는 길에는 역참을 설치했고 물자 공출했으며 관리인 다루가치를 보내 주재하게 했고 병력도 파견했습니다. 물론 이를 거부하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변화의 배경에는 몽골의 재상이 되었던 거란족 출신의 야율초재가 있었습니다. 몽골은 민족이나 종교를 초월해서 충성심과 능력 중요시하는 사회여서 성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는 중국 기술자를 등용했고 페르시아와 위구르의 상인들을 등요해 국가의 재정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몽골은 원래 금나라를 정복한 후 사람들을 다 죽이고 유목을 위해 농경지를 황무지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야율초재가 사람들을 살려주어 농사를 짓게 하거나 장사를 하게 한다면 해마다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으니 더 이득이라고 우구데이를 설득했고 설득이 통했습니다.

 

우구데이 칸의 정복 활동은 동과 서를 동시에 공격하는 방식으로 동쪽으로는 금나라가 멸망했고 서쪽으로는 그들의 세력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닿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지역은 이후 약 250년 이상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신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유럽인들이 몽골의 공격을 앞두고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우구데이 칸이 사망했고 서방원 정의 사령관인 바투가 서둘러 돌아오면서 서유럽은 침략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거대한 몽골제국

 

국호도 중국식으로 원이라고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고 기본 통치 구조도 중국식과 몽골식을 적절하게 융합했습니다.

 

몽골제국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역참 제도입니다.

 

몽골은 수도인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지역에 약 30km마다 역참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약 1500개 이상의 역참이 있었다고 하는데 내륙에 있는 역참에는 말과 수레를, 바다와 강에 있는 역참에는 배를, 북방의 역참에는 개썰매를 준비해 두었다고 합니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역마다 대기 중인 말이 400마리 이상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증빙 표식만 있으면 운송수단과 식량, 숙소를 제공받을 수 있는 포괄적 연계망이었습니다.

 

이 역참을 이용한다면 중국에서 서아시아까지 15일 만에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제국을 유지하는데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관리 외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왕래했고 원나라에서는 원활한 대화를 위한 회화책과 외국어 사전까지 만들어졌습니다. 투르크어, 페르시아어뿐만 아니라 라틴어, 독일어 사전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통역관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마르코폴로와 같은 서쪽 끝 사람이 동쪽 끝의 원나라까지 왕래했으니 몽골 제국은 세계사가 시작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 몽골역사 상식 정보에 대한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도 유용한 상식 정보를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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